영화 무산일기,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포기하는가?

숫자 세 자리가 사람보다 먼저 읽힐 때 

박정범 감독이 연출과 주연을 겸한 <무산일기>는 남한에 정착한 탈북 청년 승철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는 벽보를 붙이는 일로 생계를 잇고, 교회에서 만난 여자를 마음에 두고, 길에서 만난 흰 개를 돌본다. 이 인물은 감독의 실제 친구를 모델로 삼았으며, 그 친구는 영화가 완성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작품의 출발점이 된 감독의 단편 제목은 세 자리 숫자와 이름을 나란히 붙인 것이었다. 

영화 무산일기


당시 탈북민의 주민등록번호에 붙던 식별 번호다. 서류상으로는 분명히 국민이 되었는데, 바로 그 서류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표시한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람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가. 그리고 그 인정을 끝내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인정은 세 방향에서 온다 

자격은 주어졌으나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철학자 헤겔은 인간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통해 비로소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이 통찰을 현대 사회이론으로 확장한 악셀 호네트는 인정이 세 층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정리했다. 가까운 관계에서 받는 정서적 승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보장받는 법적 권리,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존재가 공동체에 쓸모 있다고 평가받는 사회적 가치 부여다. 승철은 두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법적 지위를 확보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나머지 두 층위가 완전히 비어 있기 때문이다. 권리를 얻는 것과 자리를 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제도가 문을 열어 주더라도 사람들이 옆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밖에 서 있게 된다. 이주민이나 소수자를 둘러싼 논의가 법적 지위 확보에서 멈추면 안 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무시의 세 가지 얼굴 

호네트는 인정의 반대편에 놓인 무시 역시 세 형태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신체를 함부로 다루는 폭력, 권리에서 배제하는 차별, 그리고 존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모욕이다. 이 영화는 그 세 가지를 순서대로 보여 준다. 승철은 이유 없이 얻어맞고, 일당을 떼이며, 억양 때문에 조롱당한다. 주목할 점은 세 번째 형태가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맞은 자국은 아물지만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판정은 내면화된다. 그가 말투를 고치려 애쓰고 자신의 출신을 감추려 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무시를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자기 편집이다. 인정받기 위해 자기를 지우는 일이 반복되면, 남는 자아가 무엇인지 본인도 알 수 없게 된다. 

인정 없이 살아가는 법 

개 한 마리가 감당하던 자리 

승철에게 조건 없이 곁을 내주는 유일한 존재는 길에서 데려온 흰 개다. 이 관계가 감상적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대체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받아야 할 정서적 인정을 사람에게 받지 못한 사람이, 그 자리를 동물에게 맡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개의 존재는 반려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승철에게 남은 마지막 인정의 통로이며, 그 통로가 닫히는 순간 그를 사람으로 붙들어 주던 힘도 함께 사라진다. 결말에서 벌어지는 일이 잔인한 이유는 한 생명이 죽어서가 아니라, 그 죽음 앞에서 승철이 보이는 반응 때문이다. 인정의 통로가 막힌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영화 속 탈북민들은 서로 의지하는 대신 속이고 빼앗는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연대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심성 때문이 아니다. 자원이 극도로 부족한 조건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곧 가장 직접적인 경쟁자가 되며, 밖으로 향할 수 없는 분노는 대개 안쪽으로 향한다. 약자들끼리 다투는 광경을 두고 그들의 문제라고 말하는 시선이야말로 구조를 가장 편리하게 감추는 방식이다. 

투쟁을 포기한 사람이 도착하는 곳 

호네트에 따르면 인정을 얻기 위한 싸움은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문제는 그 싸움이 개인에게 아무런 승산도 남기지 않을 때 벌어진다. 승철이 마지막에 선택하는 길은 인정을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인정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도덕적 기준을 내려놓는 대신 생존의 기술을 얻는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이 영화 안팎에서 반복된다. 

살아남는 일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을 협상 가능한 항목으로 분류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탈북민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인정받을 통로가 막힌 사람에게 남는 선택지는 언제나 두 가지뿐이며, 무너지거나 닮아 가거나 둘 중 하나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이게 하는 일 

이 영화가 특별한 지점은 감독 자신이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자리에 직접 섰다는 사실이다.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라진 사람의 삶을 남은 사람이 대신 재현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한 편의 영화이기 이전에 뒤늦은 증언에 가깝다. 사회적 투명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있는데도 시야에 잡히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숨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법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산일기>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한 사람을 따라간다는 것만으로 그 작업을 수행한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대우하는 일의 최소 조건은 제도도 시혜도 아닌, 그를 계속 바라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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